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īnsipiēns (1)

 

'위이잉'

문서세단기 속으로 종이가 밀려들어간다. 일정하고 반복되는 소음에 자칫 다른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태형 역시 기계처럼 종이를 집어넣다가 다른 생각에 빠진 듯 눈에 초점이 없어졌다.

 

" 태형 씨 "

번뜩 정신이 제자리로 돌아온 듯 눈에 다시 생기가 돌았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본다.

" 아, 있길래 불러봤어요. "

너무 격한 반응에 석진은 살짝 미안해져서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 이게.. "

"네?"

" 딴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이거가. "

" 아 그렇죠. "

석진은 자신이 이렇게 말주변이 없지 않은데 이상하게 태형과는 다섯 마디 이상의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태형은 언제나 정신이 나가 있기 일쑤였고 그 상태에선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의미 없어 보여 그리된 거 같았다. 오늘도 역시 세단기 타령을 했지만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태형의 모습이었다. 남에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석진에게도 은근 신경 쓰이게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라 더 친해지고 싶어 졌다.

 

" 금요일인데 약속 없으세요? "

달그락달그락 옆에서 커피를 타던 석진이 다시 한번 태형과 대화를 시도해본다.

" 있어요. "

갑자기 태형의 얼굴에 웃음꽃이 핀다. 

" 여자 친구? "

히죽히죽 웃기 시작하던 태형이 내쪽을 바라보고 입을 네모나게 만들어 보이며 히힛 하고 웃었다. 저리도 좋을까.. 

 

 

 

어느덧 퇴근 시간이 되었고 10분 정도 눈치를 보던 석진도 슬금슬금 일어나 인사를 하고 회사를 빠져나왔다. 태형의 자리는 비어있는 것을 봐 퇴근시간이 됨과 동시에 나간 듯했다.

" 어? "

도망치듯 회사를 빠져나왔지만 밖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우산을 사러 편의점에 가봤지만 갑작스러운 비 소식에 우산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 하... "

짧은 한숨을 쉬고 맞고 갈까 좀 더 기다려볼까 생각하던 석진은 건물 밖에 익숙한 뒤통수를 발견했다. 태형이었다.

" .. 그런 게 어딨어.. 야 박지민!!"

여자 친구 이름인가 태형은 조용해진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가 다시 대보면서 여보세요? 여보세요? 하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이고 퇴짜 맞은 건가.. 석진은 또다시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는 태형에게 다가갔다.

" 무슨 일이에요? "

" 아.. "

길을 잃은 아이 마냥 태형은 갈피를 못 잡고 절망스러워 보였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자니 석진의 머릿속에선 이미 아침드라마 클리셰 세네 개 정도가 스쳐 지나갔다.

" 음.. 곱창 좋아하세요? "

거절할까? 다시 말하자면 석진은 정말 남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누구라도 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한 사람의 잔뜩 상처 입은 모습 보았더라면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리라 합리화하였다.

" .. 저 곱창은 못 먹어서.. "

" 아 뭐든 상관없어요. "

" 그럼... "

 

 

" 어서 오세요. 버거X 입니다! 주문하시겠어요? "

" 머쉬룸 스테이크 와퍼 세트 하나랑.. 고르셨어요? "

" 아.. 저도 같은 걸로 "

석진은 잠시 내가 조카를 놀아주러 왔나 착각에 빠질 뻔했지만 간신히 정신을 붙잡고 주문을 추가하였다. 진동벨을 받고 자리를 잡아 앉았다. 칼퇴도 했는데 술도 마시지 못한다니 비도 슬슬 그쳐가는데 빨리 먹고 가야겠다 결심을 하던 석진이었다.

" 석진 씨? "

" 아 네 비가 다행히 그치는 거 같네요. "

" .. 저희 집 강아지 가요 분명히 저를 좋아하는데 말이에요.. 가끔 디게 못되게 굴거든요.. "

태형은 갑자기 두서없이 자기네 집 강아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회사에선 점심시간도 따로 갖고 긴 대화를 해볼 기회가 없어서 몰랐는데 냉하게 생겨서 행동은 영 딴판이었다. 

" 어떻게 못되게 구는데요? "

" .. 저랑 놀기로 했는데 갑자기 일이 생겨버리는가 하면 어떨 때는 뭐가 그렇게 맘에 안 드는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뽀뽀도 안 해주고.. "

강아지가 일이 생겨? 말은 원래 안 하잖아 석진은 그 이야기가 강아지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순식간에 알아채버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모를 리가 없겠지만..

'지-잉'

그 순간 진동벨이 울렸고 태형은 ' 잠시만요 ' 하고 후다닥 햄버거를 가지러 가버렸다.

"하... "

주제넘은 짓을 한다 했다.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좋은 꼴이 나는 걸 못 봤다. 석진은 자신의 오지랖에 거절하지 않은 태형에게 고마웠던 과거 자신을 피식 비웃었다. 

태형이 자리에 돌아오고 살짝 귀찮아진 석진은 

" 그래서 오늘도 여자 친구가 일이 생겨 버린 거군요. " 

하고 말했고 태형은 야무지게 포장을 뜯어 햄버거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석진의 말을 듣고 그대로 멈춰서 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이내 태형은 시무룩 해진 표정으로 

" 네.. "

하고 대답했다. 

반응이 귀여워서 살짝 재밌어진 석진은 다음 태형의 이야기를 기다리며 햄버거 포장을 뜯기 시작했다.

" 석진 씨 근데 사실 지민이는 남자예요... "

이번엔 석진이 햄버거를 입에 넣으려는 순간 태형의 말에 그대로 멈췄다.

" 자꾸 여자 친구라고 하셔서.. "

" 죄송해요! 아 저 그런 거 편견은 없습니다! "

석진은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커밍아웃에 당황하며 횡설수설했다.

" 그냥 넘어간 제 잘못도 있죠 뭐 "

순식간에 분위기는 서로에게 미안함으로 점령당해버렸다. 둘 다 햄버거에는 전혀 집중할 수 없었고 그저 이 이야기가 계속될지 누군가 첫운을 떼기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그때 석진이

" 그래도 서로 사랑하고 계신 거잖아요 "

" 물론이죠! "

태형은 좀 격하게 반응했다. 절대 당연하다는 듯이 행여 절대 아니여선 안된다는 듯이

" 음.. 이런 일이 자주 있나요? "

" 약속을 잡고 만날 수 있었던 거는 첫 데이트 때 밖에 없었고 모든 약속은 제가 지민이네 집에 찾아가서 만나면 다행이에요 오늘 같은 경우는 집에도 없을 거니까 찾아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기념일 챙기는 거는 상상도 할 수 없고 데이트 장소는 대부분 지민이네 집이고 헉 사귀는 거는 비밀로 해달라 그랬는데... 이야기 안 하실 거죠...? "

완전 쓰레기잖아..?

석진은 뭐라 할 말이 없어졌다. 누가 봐도 헤어지는 게 당연해 보이는 관계였다. 이미 상대방은 그러길 바라는 듯했다. 석진은 솔직하게 말할까 하다가 연애 중 고민은 주변에서 아무리 충언을 해줘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그냥 입 다물기로 했다. 이미 앞서 보였던 격한 반응을 떠올리면 분명 다른 사람들과 같을 거였다.

" 지민이 사진 보실래요? "

" 아 괜찮.. "

별로 깊게 관여할 생각은 없었던 석진이었는데 태형은 기어코 그 쓰레기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사진 속에는 방금 전 그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귀여운 얼굴의 남자아이가 있었다. 혹시 어린 학생을 사귀고 있는 건 아닌가 의심이 되어 나이를 물어보자 동갑이라는 대답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귀엽죠? 하면서 아까와 같이 입을 네모나게 만들어 웃어 보였다. 그래 저래서 누구의 어떤 말이 들어오겠어.. 석진은 더 이상 관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 아 비가 그쳤네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

" 네 전 지민이네 가봐야겠어요. 오늘 이야기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 하하.. " 

석진은 조금은 그쳤지만 아직 내리고 있는 비를 뚫으며 역 쪽으로 달렸고 방금 전 태형의 말에 질린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더는 궁금하지 않은 태형의 연애사에 관여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언제나 그렇듯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법은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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īnsipiēns (0)  (0) 2019.07.21